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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질 하는 밤: AI시대의 손끝 예술

by 양똥게장 서포터 2025.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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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생활 예술가 전시회(마포중앙도서관)

순간의 망설임

카드 명세서를 보려 휴대폰을 들었다 바로 내려놓는다. 이 털실 값이면 아이들 기모 셋업을 하나 더 사줄 텐데... 입지도 않을 옷을 만들겠다고 결제했다. 검열관이 몰려온다. '이렇게 비효율적인 취미를 왜 계속하지?'

창가에 앉아 털실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낭비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세탁기가 돌아가고, 아이들 숙제가 기다리고, 내일의 업무는 벌써부터 압박해오는데. 그래도 손은 털실을 향한다.

역사 속의 위로

발터 그로피우스의 말이 떠오른다.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통합." 1923년 바우하우스가 꿈꾸었던 그 이상을 되뇌며 뜨개바늘을 든다. 하지만 머릿속 차가운 목소리는 이미 채점을 시작했다.

'시간 대비 생산성 제로.' '재료비 대비 효율성 마이너스.'

근대 산업혁명 시대, 손으로 천을 짜던 사람들도 이런 고민을 했을까. 거대한 직기가 등장하고, 기계가 더 빠르고 완벽한 천을 만들어낼 때, 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바늘을 놀리는 내 손가락은 어쩐지 역사와 이어진 듯하다.

일상의 검열

이렇게 한가하게 앉아있어도 될까.

실수로 한 코를 놓쳤다. 삐뚤빼뚤한 내 편물이 눈에 밟힌다. 완벽하게 찍어낸 공장제품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보세요, 또 실수예요. 기계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아요." 내 안의 냉정한 검열자가 한숨을 내쉰다.

시간과 효율성의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우리의 창의성을 내놓은 지 오래다. 숫자로 측정되지 않는 가치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간다. 스마트폰 타이머가 울린다. '뜨개질 30분 완료'. 심지어 취미도 시간관리 앱으로 통제한다.

러다이트의 질문

이런 생산성 없는 일을 왜 하고 있을까. 1800년대 초 영국에서 기계를 부수었던 방직공들처럼, 나도 시대를 거스르고 있는 걸까. AI가 모든 걸 대체한다는데, 이렇게 손으로 만드는 일에 집착하는 게 옳은 걸까.

인스타그램에선 완벽한 핸드메이드 작품들이 넘쳐난다. 그들도 나처럼 실수를 하고 좌절할까? 아니면 나만 서툰 걸까? 정성스레 만든 목도리를 SNS에 올렸을 때, 친구들은 "이거 어디서 샀어?"라고 물었다. 내 손이 만든 것임을 믿지 못하는 세상에서 산다.

과정의 가치

그때 '바늘이야기'의 김대리 작가가 올린 영상이 떠오른다. 뜨개질로 성공한 그녀의 상점에서 정작 완제품은 안 팔리는데, 만들기 키트는 날개 돋친 듯 팔린다고 했다. 사람들은 결과물이 아니라 만드는 과정을 원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그 과정에서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건지도 모른다. 척박한 도시 생활 속에서 흙을 만지지 못하는 우리의 손이 실이라도 만지며 위안을 얻는 것은 아닐까.

예술의 치유력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에서는 인간은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취하고, 그 마음 깊숙이 근원적 결함과 트라우마가 자리잡는다고. 종교와 철학, 예술이 그것을 치유한다고.손으로 하는 예술은 여기저기 숨어있다. 누군가의 김장에서, 누군가의 식탁에서. 그 서툰 움직임들이 우리를 살아있게 한다. 아이와 함께 종이접기를 하며, 반죽을 치대며, 화분에 흙을 담으며, 우리는 어떤 치유를 경험하고 있는지 모른다.

내면의 예술가를 찾아서

도서관 '아티스트웨이' 워크숍에서 질문을 만났다. 내 안의 예술가는 누구인가? 예술이란 뭘까? 일상 예술가는 무엇일까? 그러다 또 검열자가 찾아온다. 이걸로 돈을 벌 수는 있는 건가?

하지만 꼭 모든 행위가 경제적 가치를 가져야 할까? 외할머니는 평생 뜨개질을 하셨지만 한 번도 그것을 팔지 않으셨다. 그저 가족을 위한 따뜻함으로 남겨두셨다. 그 따뜻함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다.

사라지는 의식들

기술이 발달하면서 일상의 의식들이 사라진다. 관혼상제도, 계절의 노동도 집 밖에서 기계가 대신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더 불안해진다.

편리함이 늘어날수록 우리의 손은 점점 더 무력해진다. 빵 반죽을 치대던 손, 옷을 꿰매던 손, 땅을 일구던 손이 이제는 스크린을 터치하는 일만 남았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캠핑과 베이킹, 원예와 같은 '불편한' 취미에 열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바우하우스를 향해

문득 깨닫는다. 바우하우스가 꿈꾸었던 것처럼, 우리도 AI와 예술의 새로운 조화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AI가 대체하는 게 아니라, 인간다움을 더 빛나게 하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AI 어시스턴트 Claude와 이야기하며 생각을 다듬는다. 기술은 위협이 아닌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바우하우스가 되지 않을까.

어쩌면 미래의 창작은 AI의 효율성과 인간의 불완전함이 만나는 지점에서 꽃피울 것이다. 삐뚤빼뚤한 내 뜨개질이 가진 독특한 가치를 인정하며, 오늘도 나는 뜨개바늘을 든다. 내 안의 검열자는 여전히 속삭이지만, 이제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기로 한다.